“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로마 6:8)
†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고난받으신 주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새로운 사순절기를 더욱더 은혜롭게 보내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힘든 상황에서, 친교와 일치의 삶을 위해 노력하며 교회를 섬기시는 신부님들과 교우님들과 수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재(灰)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40일간의 사순절기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사순절기 동안,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運命)과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소명(召命)을 교차시키며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사명(使命)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사순절기는 우리 교회의 신앙과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 회복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피는 은총의 절기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주님께서 가신 구원의 길을 따르기 위해서 기도와 금식 그리고 절제의 삶을 살도록 안내합니다. 기도와 금식 그리고 절제의 삶 그 자체가 신앙의 목적은 아닙니다마는, 기도와 금식 그리고 절제를 통해서 나의 거짓 자아, 몸과 마음 깊숙이 새겨진 욕망, 욕심, 집착의 뿌리를 살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함입니다.
사순절기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로 집중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서 말씀을 읽고 묵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말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오래 머물러 묵상하면 그 말씀에서 생수가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그 생수는 우리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사순절기 동안 이러한 신앙 훈련과 노력을 통해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새로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과 희망을 품고 올해 사순절기를 시작하기 바라며 몇 가지 지침을 권면합니다.
- 코로나-19 방역단계가 2단계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나아져서가 아니라, 많은 이들의 생활을 회복하기 위해서 일괄 통제보다도 개별방역 강화로 강조점을 옮긴 것입니다. 사업과 영업과 살림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교회로서는 적은 인원이라도 대면 성찬례를 다시 드릴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대신에 더욱더 철저히 방역 수칙을 지켜주십시오. 지역교회의 여건을 고려하여 교우들이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혜와 정성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비대면 성찬례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면 총사제에게 보고하고 우선 시행할 것을 관면(寬免)합니다.
- 사순절기에 금식과 절제로 마음을 비우는 일과 영적 독서와 기도로 마음을 채우는 일이 모두 필요합니다. 이번에 비아출판사에서 펴낸 ‘사순절과 부활절기를 위한 기도 노트’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권해드립니다. ≪죠만민광照萬民光≫(대한성공회 초기문헌1)(성공회출판사)도 찬찬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생활과 묵상>, 그 밖의 여러 ‘사순절 묵상집’을 활용하여 영적 독서와 묵상 기도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 올해 사순절기는 여전히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교회 모임이 축소된 상태에서 지키게 됩니다. 성공회 서울교구가 비전으로 삼은 “친교의 신앙으로 선교하는 제자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두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사순절기 동안 열흘에 한 번 이상, 성직자와 개별 교우가 함께 ‘고해성사’ 곧 ‘화해의 예식’을 거행하도록 권면합니다. 교우들께서는 충분히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고 ‘바로잡을 일’과 ‘새로 다짐하는 일’들을 적어 보시되, 성직자와는 ≪성공회 기도서≫ 347쪽 이하의 고해성사를 간결히 거행하시고, 마음을 열고 충분한 신앙 상담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교회 안에 적절히 칸막이를 마련하여 공간을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교우들이 작성한 성찰 기록은 부활밤 ‘새불축복식’ 전에 불사르는 의식을 가져도 좋겠습니다.
- 이번 사순절 극기헌금은 코로나-19 이후 더욱 심각해진 ‘어려운 교회를 위한 지원’에 쓰이도록 봉헌됩니다. 사순절기의 신앙이란 곧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며 우리와 새로운 친교상통의 관계로 함께하심을 약속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는 일입니다. 이 신앙이 극기헌금으로 표현되어, 함께 기뻐하고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는 친교상통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사랑으로 전해지기를 기대합니다.
충실히 지킨 사순절기는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부활절기로 이어집니다.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어서는 마침내 부활의 은총으로 새길을 열어주시는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교회와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2021년 2월 17일 재의 수요일에,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교구장 이경호 베드로 주교